영화관 접근성이 좋은 동네로 이사 와서 살다 보니깐 자연스레 VIP가 되어버린 지 4년 차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올해 내에 관람 예정인 영화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영화관에서 120편을 본 것으로 통계가 나온다. OTT로 본 거까지 합하면 150편 정도는 되려나? 내년엔 OTT로 본 것도 정리를 해봐야겠군. 집에선 잘 못 보는 편이지만...
올해는 좋은 영화가 많은 해였던 것 같다. 특히나 하반기에 좋은 영화가 쉴 틈 없이 쏟아진 느낌. 베스트 10 고르는 데도 고민을 많이 했고, 그중에서도 하위권은 더더욱 경쟁이 치열했다. 이미 지난주에 결산을 냈는데 그 사이에 또 좋은 영화를 봐버려서 순위에 약간 변동이 생김. 최종_진짜최종_진짜진짜최종.jpg
2021년 12월 20일부터 2022년 12월 25일까지의 국내 정식 개봉작 기준으로 선정.

10위: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작품으로 처음 알게 됐는데 각본을 정말 잘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의 영화는 대체로 화려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고(다 본 건 아님) 배경도 단조로운데, 그만큼 촘촘하게 잘 짜인 밀도 높은 대사가 나머지를 다 상쇄시키는 느낌이라고 할지. 대화만으로 이렇게 설명충 느낌 없이 흡입력 강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귀하다. 다만 이 영화는 하루키 원작이라 조금은 불쾌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분명 있기는 한데, 특히 오토의 캐릭터 설정이라던지... 하루키가 그리는 여자상은 묘하게 거북하다. 상처받은 내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도 주지 않고 사라진 사람을 깊은 곳에 묻고 살아야 하는 이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

9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요아킴 트리에
10년 전쯤 봤다면 좀 더 높은 순위를 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율리에보단 악셀에 더 이입하는 나이가 되어버렸기 땜시🥲 다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자책했던 시간들이 알고 보면 그 또래 여자애들은 다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었고 내가 나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준 영화. 무엇보다 삽입곡들이 훌륭해서 덕분에 좋은 음악을 많이 들었고 순간을 멈추고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연출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장면 촬영 비하인드 알고 나니깐 더 사랑스럽게 느껴짐(길 가던 오슬로 주민들이 뭐야뭐야 재밌는 거 하나? 하다가 엑스트라로 참여했다고. 그리고 CG 아니고 사람들이 정말로 멈춰있는 거...)

8위: <본즈 앤 올>, 루카 구아다니노
껄껄. 지난 주만 해도 4위였는데 급격한 순위 하락... 이래서 영화 보고 바로 평가를 하면 안 됨...
하지만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영화였다. 마음 둘 곳이라고는 없는 이 세상 속에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는(..) 이런 서사 난 환장하거든..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고프다. 우리 둘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는데. 이 영화 역시 내가 좀 더 어릴 때 봤더라면 아마 꽤 높은 순위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슬퍼 나이 너무 많이 먹었어..

7위: <놉>, 조던 필
사운드만으로 이렇게까지 무섭다고 느꼈던 영화가 있었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심장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에 절여져 있다. 난 언젠가 이런 행태가 인간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물론 좋은 의미로)을 꼽으라면 단연 OJ가 말 타고 황야를 달려갈 때 아이맥스 비율로 전환되던 부감샷을 꼽을 것.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까 매번 놀랍기만 한 조동필 씨였습니다..

6위: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2월에 처음 관람한 순간부터 '이건 올해의 영화다!' 싶었다. 사랑영화라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청춘영화도 아니고 성장영화도 아닌 거 같은데, 이상하게 다 보고 나면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뭔가가 몽글몽글 차오르는 기분. 천연색색의 소품, 의상, 배경에 자연광이 만들어 내는 플레어가 어우러지는 화면이 아름다웠고, 올해 제일 많이 들은 OST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있는 힘껏 달려 가는 모든 장면이 사랑스럽다. 어쩌면 나는 달리는 장면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5위: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하마구치 류스케를 신뢰하기로 했다. 3>1>2 순으로 좋았는데 3편은 너무 잘 만든 단편이어서 달리 덧붙일 말도 없음. 우연한 순간에 사람들은 늘 상상을 떠올린다. 상상 속에서 과거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기도 하고 듣고 싶었던 말을 듣기도 하고. 비록 내가 바라던 사람, 장소, 시간은 아니더라도. 1편도 너무 웃기고(특히 홍상수 줌) 귀여워서 좋았다. 이렇게 기분 좋고 애틋한 영화는 너무 소중해. 2편은 소설 속 내용 때문에 오해받는 경향이 있는 거 같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받는 사람 메일 주소에 segawa를 sagawa로 쓰는 거 진짜 빵 터졌잖아,,
여담이지만 <해피 아워>도 비슷한 시기에 봤는데 5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잊을 만큼 몰입도가 대단했다. 다작을 기원하고 싶은 감독.

4위: <가가린>,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트로윌
본지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혹시 너무 성급한 평가인 걸까..? 하지만.. 넘 좋았다구요ㅠㅠ
올해의 끄트머리에 이렇게 좋은 영화를 또 만날 줄 정말 몰랐다. 우주, 특히 달과 오래된 건물에 대한 애착과 첫사랑이 나오는 영화를 사랑하지 않는 법 나는 모른다네.. 아직은 울타리가 필요한 아이가 만드는 자기만의 우주, 그리고 그 우주를 지켜내려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아름답고도 슬펐다. 나 혼자만 남겨지는 그런 거 난 참을 수 없어 와앙...ㅠㅠㅠㅠ 어떤 공간을 깊이 사랑하고 잃어본 적 있나요.. 그리고 그 공간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과의 시간을 그리워해본 적 있나요... 꼭... 봐주세요..... 포에틱 시네마...

3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니엘스
말해 뭐해다 진짜. 정신없이 깔깔 웃다 보면 어느샌가 눈물을 좔좔 흘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 인간은 누구나 나의 불안을 이해해 주고 자기를 구원해 줄 존재를 찾게 된다. 지금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다른 멀티버스에서는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세상은 결코 허무하지 않으며, 결국은 다정함이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는 사실. 당신이 딸이라면,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ㅜㅜ 엄마... ㅜㅜ

2위: <애프터 양>, 코고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왔던 6월 초의 공기, 햇빛, 나뭇잎, 그림자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기억하는 일은 아름답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사진으로 담고 기록에 남기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어도, 시간이 지나며 그 기억이 조금은 왜곡되었을지라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오래도록 가슴속에 간직하는 내가 되어야지. 그리고 그 기억들을 충분히 돌아보고 음미한 다음 사랑하는 존재를 진정으로 떠나보내야지.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1위: <헤어질 결심>, 박찬욱
...그렇게 됐다.. 아무래도... 이 영화가 되겠네요.....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 외 안타깝게 베스트 10에 들지 못한 영화로는 <맥베스의 비극>, <큐어>, <썸머 필름을 타고>, <탑건: 매버릭>,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아마겟돈 타임>, <성적표의 김민영>, <RRR>, <배드 럭 뱅잉>, <더 배트맨> 등이 있겠습니다.
내년에도 또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나게 되기를 바라며 이만...